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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수 두 번 끝에 6등급>연세대 합격 후기..

  • 익명
  • 일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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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연세대라 그런지 필력이....ㅎㄷㄷ

반수를 두 번 한 것도 너무 대단해요




(이하 펌)




고2 평균 6등급에서 공부를 시작해 두 번의 실패를 겪고 좌절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결국,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이야기 그리고 연세대학교 1학년부터 4학년, 지금까지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한 달에 걸쳐 적어보았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느낀 점이 있는 누군가는 분명 성공하리라 자신합니다!

길고 길어서 제 책에만 실어 놓으려고 했으나,

이 글을 읽고 성공할 누군가를 위해, 이곳에 글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18살부터 25살까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살아온 제 7년의 이야기를

총 2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해 보았어요. 엄청 길죠?!



읽고 싶은 부분까지만 읽어 보셔도 좋아요!

하지만, 첫 문단을 읽는 순간, 여러분은 분명 순식간에 다 읽게 될 거예요!

아니라구요?! 어디 한 번 실험해봅시다!



에세이처럼 재미있게 썼으니, 흥미로운 삼반수 썰, 인생 썰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국어 공부 한다 생각하고 시간 내서 읽어보셔도 좋구요!



이 글을 읽고 마음이 움직여 성공할 그 누군가를 위해

저의 길고 긴 실패와 성공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2017년 고등학교 2학년, 그때





<1> 나는 그 날 PC방에서 불나방을 봤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PC방에 갔다. 당시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류의 게임을 그리 잘하지 못했던 나는 항상 먼저 게임이 끝났기에, 남은 친구들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항상 먼저 끝나면 그렇게 기다려 왔었다. 적어도 그 날 전까진 그렇게 했었다.



그 날은 뭔가 달랐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였을까. 문득, 의자를 뒤로 쭉 빼고 기지개를 켜듯 누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일렬로 늘어선 컴퓨터와 사람들, 갖가지 환한 빛을 내는 모니터와 목을 앞으로 빼고 그 화면에 집중한 내 친구들. 마치 불빛에 현혹되어 뛰어드는 한 마리의 불나방같이 느껴졌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게임소리, 음악소리, 말소리, 시끄러운 소음공해 속에서 나는 기나긴 공상에 잠겼다. 나는 그래도 남들과 다를 줄 알았다. 나만은 적어도 잘될 줄 알았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나도 똑같은 불나방이었다. 당장의 쾌락과 행복만을 쫓았다. 즉각적인 피드백이 좋았으니까. 게임하고 수다 떨고 누워서 핸드폰 하는게 좋았으니까.



달라지고 싶은 마음에 했던 기나긴 공상 끝에는 결론이 있어야 했다. 게임? 잘하지 못한다. 미술? 음악? 재능이 없다. 공부? 평균 6등급이다. 기술? 손재주가 없다.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다. 하지만 생각이 꼬리를 물 수록 두려움만 커져갔으니, 얼른 결론은 내려야만 했다. 컴퓨터를 껐다. 친구들은 의아해하며 나를 돌아보았지만,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가 더이상 없었다.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다면, 그나마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걸 선택해야 했다. PC방을 나와 그 길로 서점에 갔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던 그 날, 고등학교 2학년 12월 말에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2> 나는 평범함이라는 독에 중독되었다.



축 늘어진 어깨에, 텅 빈 가방 하나를 매고 서점으로 향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직감에, 고개를 떨군 채, 지금까지 살아온 부끄러운 과거를 곱씹어보며 걸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교우관계도 원만했고 가정환경도 평범했다. 공부는 평균적이었다. 공부와 숙제를 하기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빼먹을 정도로 질이 나쁜 아이도 아니었다. 생각에 잠겼던 나는 이내,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내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다 문득,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도의 뉘앙스가 내겐 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다들 이 정도 하니까. 다들 게임하니까. 다들 숙제 가끔 베껴가니까. 다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매점 가니까. 이 평범함이 주는 안락함을 굳이 깨부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평범함을 깨부수는 수고로움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건 독이었다. 도전이나 노력을 막고 나태한 삶에 안주하게 만드는 그런 독.



평범함에 중독된 지금의 나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조금 더 먼 과거의 일을 머릿속에서 끄집어 내어 보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새벽 일찍, 인력 사무소에 나갔었다. 지명이 될 때까지 바깥에 놓인 난로에 얼어붙은 손과 발을 기대어 놓았다. 14살인 나는 그곳에서 가장 어렸기에, 끝내 이름이 불리지 않거나 운이 좋다면, 공사장의 잡일부로 불려갔었다. 모래주머니를 나르고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15살의 나는 한 예식장에서 일을 했다. 멋드러진 정장을 차려 입고 하객들을 맞이하는 근사한 일은 아니었다. 화사하고 고급진 대리석 뒤, 온통 짙은 회색 뿐인 창고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다. 하루 중 11시간은 바깥을 본 일이 없었다. 하루는 나르고 있던 음식을 쏟아 조리과장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다. 음식을 가득 실은 공장용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 붉게 달아오른 뺨과 겨우 닦은 눈물 자국을 가진 중학생 한 명이 짙은 회색빛의 엘리베이터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많은 일을 했다. 편의점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고기집에서 삼겹살을 구웠고 뷔페에서 설거지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회만 된다면 일단 가서 일을 했다. 이것저것 따져볼 시간이 없었다. 나에겐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내 인생을 내 스스로 꾸려가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물론, 공부가 하기 싫어서 일을 했던 것도 맞다. 성격이 급한 내게, 일은 한 달마다 월급이라는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주었기에, 성과가 없는 공부보다 100배는 더 좋았다.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더벅더벅 걷던 나는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목표였다. 나의 독기 어린 목표가 평범함을 이겨낼 해독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문득, 서울에 가고 싶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서의 낭만적인 삶을 꿈꾸듯 그때의 내겐 서울이 유럽처럼 느껴졌다. 저녁 노을, 낭만이 흐르는 한강을 보며 맥주를 마시는 나를 상상하며, 살면서 몇 번 가본 적 없는 서울을 목표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때쯤, 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3> 나는 허름한 독서실, 비좁은 8인실 한 켠을 빌렸다.



서점에 들러 1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중학교 1학년 수학책 한 권과 EBS 국어책 한 권, 영어 단어책 한 권을 샀다. 처음으로 가방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집 앞에 있는 허름한 독서실 한 켠을 빌리고 앉아 세 권의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8인실의 비좁은 독서실은 케케묵은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내게는 너무나도 낯선 이 공간에, 한 바퀴 공허한 회전을 그리곤 자리에 앉아 서점에서 사온 세 권의 책을 이리저리 들춰 보기 시작했다. 역시, 아는 게 없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막막했다. 공부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하지만, 공부는 해야 했다. PC방에서 친구들을 뒤로 한 채 나왔던 그 순간부터 나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생겼다. 이윽고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와 거실 프린터 밑에 있는 A4용지 한 다발을 훔치듯 가져와 다시 8인실,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A4 용지를 책상 위에 쌓아 두고 필통에 있던 샤프 하나를 꺼냈다. 왼쪽에는 수학책 오른쪽에는 A4 용지를 놓고 목차부터 따라 적기 시작했다. 모르는 단어 투성이였다. 목차를 다 적고 이번엔 개념 부분을 따라서 적기 시작했다. A4 용지 두 장을 채워갈 때쯤, 개념 부분이 끝나고 문제가 나왔다. 자세를 고쳐 앉고 문제를 풀어 보았다. 역시나 풀리지 않았다. 다시 도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지 못했다. 식은땀을 닦으며, 이번엔 해설지를 빼 들고 A4 용지에 해설을 그대로 베껴 적기 시작했다. 그때 깨달았다. 해설지가 나보다 1000배는 똑똑했다. 똑똑한 사람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때부터 문제가 안 풀리면, 해설지를 베껴 적으며 외웠다. 그러자 점점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서실에서 2시간 공부하고 집에 갔다. 그러다 점점 4시간, 6시간, 8시간,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자리에 앉아 A4 용지에 책을 받아 적는 능력을 획득했다. 하루 종일 독서실에서 국어, 수학, 영어와 씨름했다. 공부하는 법을 몰라서 그냥 닥치는 대로 적고 외우고 받아들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유독 문제가 풀리지 않는 날에도 붉어지는 눈시울을 닦아내며 그냥 공부했다. 이제 고3이 되는데, 중학교 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쪽팔리고 분해서 눈물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 다 내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멍청한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하고 나니 길은 하나뿐이었다. 계속 하는 수 밖에, 계속 이렇게 시간을 들여 앞서간 사람들을 따라잡는 수 밖에, 지나간 수많은 시간들을 메우는 수 밖에, 이것 외에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점점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는 핸드폰을 2G 폴더폰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3월까지 매일, 독서실에서 살았다.

2018년 고등학교 3학년, 그때





<4> 즐거운 상상의 끝엔 항상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비좁은 도시 하늘의 희미한 햇빛을 멍하니 쳐다보며 학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지만 가방만큼은 무거웠다. 역에서 15분 남짓의 학교까지 걷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겨울방학동안 공부를 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연세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목표를 정하기 위해 대학교를 찾아보다 다만 마음에 꽂혔을 뿐이었다. 그 날부터 줄곧 그곳을 다니는 상상을 하며 걸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기에 인터넷에서 본 사진들이 나의 상상의 한계였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걸으며 웃고 있는 나를 열심히 집어 넣어 보았다. 하지만, 이런 즐거운 상상의 끝엔 항상 아프고도 비참한 현실적인 고민이 있기 마련이었다.



학교에 도착해 책상에 가방을 걸고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 미처 끝내지 못한 수학 문제를 풀며 끙끙 앓고 있을 때, 옆자리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야, 1교시 한국사야 지금 나가야 돼.” 그 말을 듣고 익숙한 듯 수학책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1교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 자리는 이곳 복도였다. 2주 전, 새학기가 시작되고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6등급인 내신 성적으로는 그 어느 곳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수능을 준비하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 뒤, 각 과목 선생님을 찾아가 수업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문의를 드렸지만, 거의 대부분 반대하셨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나는 어떻게든 타협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복도에 엎드려서 공부하게 되었다. 허리는 아팠지만 나름대로 최선의 타협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만족했다.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리고 내겐 거대한 희망이 있었다. 1주일 전, 3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3등급, 수학 1등급, 영어 3등급을 받았다. 물론, 전범위를 본 것도 아니었고 찍은 문제도 맞은 덕이 있었지만 수학 7등급에서 4개월만에 1등급이라는 수직에 가까운 성적 상승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그 케케묵은 냄새를 품은, 나 밖에 없는 8인실 그곳에서 매일 8시간을 수학에 쏟았던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국어도, 영어도 각각 6등급, 5등급에서 많이 올렸다. 매일 밤마다 나를 짓누르던 원인 모를 중압감이 그 날에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었다. 중학교 과정부터 공부한다고 은근히 무시하던 친구들도 이젠 내게 방법을 묻기 시작했다. 그 날부터 나는 더더욱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5> 나는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더 듣고 싶었다.



나름 성공적인 3월 모의고사였지만, 연세대가 목표였던 나에겐 아직 가야할 길이 너무나도 멀었다. 3월에 와서야 겨우 고3 과정의 일부만 따라가고 있었기에, 해야 할 일은 정말 산더미였다.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낭비하고 있는 시간을 적어보고 싶어졌다. 가장 먼저 고치고 싶었던 늦잠,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한 채로 느리게 먹는 아침밥, 점심, 석식 시간마다 하는 친구들과의 잡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시간, 집에 와서 씻기 전 멍때리는 시간 등 나도 모르게 낭비하는 시간들이 많았다. 낭비되는 모든 행동을 종이에 적은 다음,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계획했다. 그리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실행에 앞서,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먼저, 직장에 일찍 출근하시는 아버지께 나가기 전에 한번만 깨워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어머니께 아침마다 학교에 차로 데려다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다행히, 두 분 모두 나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이제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새벽 5시 40분쯤, 아버지께서 자고 있는 나를 끌어다 화장실에 넣고 샤워기를 틀어둔 채로 출근하셨다. 1~2분 동안 물을 맞으며 정신을 차린 나는 머리를 감고 나와 전 날 밤, 어머니께서 싸주셨던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다음, 가방을 메고 어머니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도시락을 먹었다. 그렇게 아침밥을 먹으면서 학교에 도착하면 6시 20분쯤이 되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 나밖에 없었다. 약간의 승리감을 느끼며 책을 꺼내면, 6시 30분이었다. 그때부터 야자가 끝나는 10시까지, 복도로 쫓겨나는 시간을 빼곤 거의 움직임 없이 자리에 앉아 플래너에 산더미처럼 쌓인 할 일들을 하나씩 끝냈다. 점심, 석식도 빠르게 먹고 평소라면 매점에 들러 먹었을 아이스크림도 더이상 먹지 않았다. 중간중간 졸음이 밀려들면, 자발적으로 복도에 나가 엎드려서 공부했다. 그렇게, 나의 루틴을 만들고 매일 똑같이 행동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친구들이 그때부터 나를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미친놈. 이 말이 나는 너무나도 좋았다. 돌풍이 일고 있는 나의 내면 상태가 어떻건 간에, 적어도 외부적으론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비쳤기에 들을 수 있는 찬사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말에 힘 입어 더 미친놈이 되기로 다짐했다. 그 길로 학교 수위 아저씨를 찾아가 일요일에 학교에 나와도 되겠냐고 부탁드렸다. 나조차도 반신반의한 부탁이었지만 아저씨께서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때부터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똑같은 루틴으로 매일을 살았다. 매번 책을 옮길 수고와 체력 낭비도 덜 수 있었다.





<6> 뜻대로 된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하루 12시간 이상의 공부시간을 확보한 루틴을 매일 돌린 결과, 성적은 정말 꾸준히 올랐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매일이 힘들었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눈을 뜨며 어서 이 생활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차에서 먹는 아침밥은 체할 것만 같았다. 공부를 시작한 것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다. 밤마다 눈물을 조용히 닦으며 집으로 갔다. 그래도 조금만 더 견뎌내면, 그 끝에 빛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버텼다. 9월 모의고사에서 전교 2등을 했다. 연세대가 매우 가까웠다. 갈 수록 체력은 깎여갔지만 지금 멈출 수는 없었다. 더 버텨야 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저녁 8시 반쯤, 야자 1교시 때였다. 탐구를 풀던 나는 옆으로 쓰러졌다.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학교에 구급차가 왔다. 어느 1층 응급실에 들어갔다. CT를 찍고 누워 있는데, 저 멀리 어머니, 아버지께서 뛰어오셨다. 뒤이어 사복 차림의 의사가 뛰어 들어와 그곳에서 바로 마취 후, 내 옆구리를 절개하고 호스를 밀어 넣으셨다. 폐에 문제가 생겼고 한다. 다음날, 인생 처음으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실은 몹시 추웠다. 하지만, 그때는 수술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쓰러졌던 그때가 수능을 2주 앞둔, 11월 초였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누워 있던 나는 어머니께 부탁드려 받은 책들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오른쪽 폐에 문제가 생겼기에, 오른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나는 오른손잡이였다. 왼손으로 수학을 푸는데, 눈물이 났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내게 어머니께서 옆으로 다가와, 너무 마음 쓰지 말자고, 한 번 더 봐도 좋으니 회복부터 하자고 하셨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는 게 아니었다. 이러자고 8인실 그 비좁은 방에서 고군분투했던 게 아니었다. 이러자고 1년 간 미친놈처럼 공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 해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다시 교실에 나타났을 때는 수능 며칠 전이었다. 루틴이 무너지며, 거대한 벽 앞에 서있는 듯한 무력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지금까지 했던 공부들을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2019학년도 수능을 보게 되었다. 국어부터 식은 땀을 흘렸다. 한 번도 마주해보지 못했던 돌발상황을 이 날 모두 맞닥뜨렸다. 수학도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아랍어까지 모두 마치고 수능 시험장을 터덜터덜 빠져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 있었다. 저 멀리 나를 기다리고 계신 부모님을 보았지만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렇게 나의 첫 수능이 끝났다.



8인실의 비좁은 독서실에서의 4개월과 고3 1년 간의 기나긴 이야기를

2019학년도 수능 국수영탐탐 32122로 마무리 짓게 되었다.

분명하게 올랐지만, 또 분명하게 떨어졌다.

2019년 20살 반수, 그때





<7> 꿈에 그리던 서울이었지만.



2019년 2월, 나는 서울로 상경을 하게 되었다. 고3 수능에서 받은 성적으로 국숭세단 라인의 대학에 합격했고 이미 누나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부모님께서도 서울로 발령을 신청하신 끝에, 온 가족이 서울의 어느 언덕 한 켠에 살게 되었다. 비록 자취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은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처음 갔던 강남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에 한동안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어붙어 있던 적이 있었다. 홍대입구역에서 나와 길을 잃고 연남동까지 걸어간 뒤, 한동안 연남동을 홍대로 착각한 적도 있었다. 건대에서 술을 마시고 7호선에서 깜빡 잠들어 부천에서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나의 첫 대학 생활은 어땠던가. 동아리, 축제, MT 등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 많은 추억을 쌓았다. 전공 수업에서 열심히 필기도 했고 철학 수업에서 교수님과 토론도 했으며 코딩 수업에서 파이썬과 씨름하는 날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면서 각자 다르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말부터 하지 않았던 아르바이트도 다시 시작했다. 간판이 고풍스러운 집 앞 작은 카페에서 일을 했었다. 가끔 어머니께서 방문하실 때면, 몰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타드린 적도 있었다. 소소하지만 작은 즐거움들로 삶을 채워가고 있었다. 카페 알바와 함께 아웃백에서 서빙 알바도 도전했었다. 약간 서툴렀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워가며 열심히 다녔었다. 여느 대학생처럼 살았다고 생각한다. 여느 대학생처럼 원만한 교우 관계, 원만한 아르바이트, 원만한 학교 생활. 소소한 행복이 있었고 그 나이 때 느낄 수 있는 애틋한 감정, 생각들을 경험하며 살았다. 적어도, 우연히 신촌에서 약속이 생겨 연세대학교 앞을 지나치게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나는 이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 줄만 알았다.





<8> 그 날, 연세대학교를 지나치지 않았다면.



작열하는 태양의 박자에, 춤을 추듯 일렁이는 도로의 아지랑이를 곤히 잠재우려는 듯, 그 날은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늦여름이었다.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만나자는 친구와의 약속에 아침부터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버스에 탔다. 비에 다 젖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버스 창가에 가만히 고개를 뉘인 채, 에어컨이 주는 추위에 닭살 돋은 팔을 어루만지며 날씨에 대한 불평 어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눈에 들어온 반대편 창가의 버스 노선도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애초에 타려고 생각했던 버스와 다른 버스를 타고 있었다. 원래는 신촌역으로 바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았는데, 이 버스는 연세대 정문 쪽으로 가는 버스였다. 하지만, 이내 그냥 이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창가에 고개를 뉘었다.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으니 움직이는 것 자체가 귀찮았었다. 사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연세대가 궁금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 연세대 정문에서 버스가 멈췄고, 우산을 펼치며 계단을 뛰어내린 내 눈 앞에는 사진으로만 봤던 그곳이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정문 뒤로 곧게 끝없이 펼쳐진 길과 그 길을 호위하듯 양 옆으로 정렬되어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일순간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세차게 내리던 빗소리도, 그 빗방울이 우산을 튕기며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8인실임에도 나의 자리에만 불이 켜진 그 비좁은 책상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닦으며 책을 받아 적던 그때의 내가 생각나 안쓰러워졌다. 여름에 복도에 엎드려 땀이 종이에 떨어지면 황급히 소매로 닦아내던 그때의 내가 생각나 안쓰러워졌다. 나는 지금보다 어렸던 나의 수 많은 노력이 떠올라 지금 이곳에 서있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플래너에 수십 번도 더 적었던 연세대학교에 대한 꿈을 잊어버리려 애쓰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서울에서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 날, 친구와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에서 나는 침잠했다. 무언가를 그토록 갈망해본 적이 있었나. 없었다. 그 갈망이 좌절되었을 때 나는 어땠나. 잊으려고 애썼다. 그 갈망이 후회로 남진 않을까. 후회가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가. 나는 잘될 것인가. 실패하진 않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나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걷고자 하는 걸까. 내가 이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다른 무엇도 아닌 후회 때문에, 다시 한 번 수능을 선택해야 할 만큼 간절한가. 그 무수한 생각의 끝엔, 단 한 가지 대답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때의 간절함을 기억하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간절했다.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던 늦여름, 2019년 7월 말, 나는 반수를 결심했다.





<9> 이제 정말 낭떠러지 바로 앞이다.



8월 초,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털어 집 앞 독서실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비좁지만 따뜻한 냄새가 났던 16인실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서울에서 왠지 모르게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종이를 꺼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작년 수능부터 지금까지 공부를 손에서 놓았었기에, 볼펜을 잡는 것에 적응하는데 한참 걸렸다. 수능까지 100일 정도 남아 있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도전했다면, 지금 내 상황에 불만 따윈 시간 낭비였다. 차근차근 할 일들을 정리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침 6시 반부터 9시까지 24시간 스터디카페에 갔다. 9시에 독서실이 열렸기 때문이다. 9시에 스터디카페에서 독서실로 걸어가며 김밥을 먹었다. 독서실에 앉아 12시 반까지 이어서 국어를 공부했다. 12시 반부터 12시 50분까지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먹었다. 12시 50분부터 6시까지 수학을 공부했다. 6시부터 6시 20분까지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6시 20분부터 10시까지 영어와 탐구를 공부했다. 그리고 언덕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 올라갔다. 언덕의 가로등은 언제나 환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나는 매번 축 늘어진 어깨와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고개를 떨군 채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10월 말, 학교로부터 제적 처리 문자가 날아왔다. 전에 다니던 대학교는 1학년 2학기 휴학이 규정상 불가능했다. 나는 퇴학 당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문자를 받고 나니,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뒤가 없었지만 이젠 정말 낭떠러지 바로 앞이었다. 잠을 더 줄였다. 밥 먹는 시간을 더 줄였다. 돈도 점점 떨어져 갔다. 이런 무모한 반수를 반대하시던 아버지의 확고한 신념으로 용돈이 끊긴 지 오래였다.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동안 이미 너무 많이 잘해주셨다는 걸 안다. 치기어린 나의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미 풀었던 교재를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풀었다. 저녁에 먹던 편의점 도시락도 김밥 한 줄로 바꿨다. 모든 걸 줄여가는 와중에도 독서실 책상 앞에 붙였던 연세대학교 로고 프린트는 떼지 않았다. 내 선택의 마지막 이유이자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 매일의 간절함이 나를 이끌었다. 낭비한 시간이 없었다. 반수를 시작할 때 폴더폰으로 바꾼 나였다. 그 정도 각오는 했다. 그렇게 2020학년도 수능을 보러 갔다. 하지만, 인생이 항상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또 한 번 경험해야 했다. 국어부터 시간이 부족했다. 뒤로 갈 수록 체력이 떨어짐을 느꼈다. 이미 한 번 실패를 경험해봤기에 덜 아플 것 같았지만, 두 번째 실패는 상상 이상으로 더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3개월 간 비좁은 16인실 독서실에서의 반수를,

2020학년도 수능 국수영탐탐 21131로 마무리 짓게 되었다.

탐구에서 2개를 틀린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2020년 21살 삼반수, 그때





<10> 그때 나는 소설가를 꿈꾸게 되었다.



좁다랗고 긴 회백색의 창살 사이로 하이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불이 꺼진 텅 빈 방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창살 틈으로 눈 내리는 광경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봄이 머지 않았는데, 늦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언덕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한참 멍하니 언덕 너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떨궜다. 짙은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생각을 정리할 때가 됐다.



작년, 마지막 3개월 동안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꿈꿨고 터널 끝에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길 간절히 바랐었다. 나에게 낯선 타지인 이곳 서울에 친구 한 명 없이 올라왔어도 그 무수한 근원적 고독감 마저도 목표라는 단 하나의 이상으로 여기까지 이겨내 온 나였다. 외로움과 불안함을 끝끝내 떨쳐내지 못하고도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이곳에서 무너졌다.



중경외시 라인의 대학에 입학했다.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았다. 하루 종일 집에서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 했다. 수능 끝나고 시작했던 게스트 하우스와 음식점 알바를 잘렸다.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밥을 사주시던 사장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텅 빈 방 한 구석을 빌려 쪼그리고 앉은 나는 지금껏 꾹꾹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만을 바라볼 때는 그 어떤 불안과 고독도 나를 잠식하지 못한다. 오직, 그 이상에 현실이 개입되었을 때만 나는 끝없는 침잠을 경험해야 했다.



6개월간 집 밖에 나간 횟수를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방에 틀어박혀 혼자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거창한 책이 아닌 단순한 소설이었다. 이것들이 잠시나마 내 현실을 가리워 주길 바랐다. 책을 수 십 권 읽어가며 그때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성격이 점점 멜랑콜리해져감을 느꼈다. 소설가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1학기가 끝나고 한 달쯤 지나 휴학 신청을 했다. 나는 다시 나 스스로를 긴 터널 속으로 밀어 넣기로 했다.





<11> 기나긴 터널 끝에 빛이 있기를.



찌는 듯한 더위에 목마른 매미가 지저귀는 7월, 나는 방 한 구석에 앉아 빈 종이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가고 있었다. 더이상 독서실을 다닐 돈이 없어서 집에서 공부를 했다. 책상 앞에 연세대 로고를 프린트해 붙여 두었다. 끝없이 나를 옭아매는 이 지긋지긋한 나의 목표가 이제는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다. 나는 빈 종이 위에 <나의 실패 일기>라고 큰 글씨로 적어 보았다. 그리고 그 밑으로 번호를 붙여가며 천천히 과거를 곱씹기 시작했다. “나는 첫 번째 수능에서 멘탈이 무너져 망했다.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듬해 수능에서도 나는 똑같았다.” ,,, “나는 지금껏 많은 공부를 했다. 중요한 건, 무엇을 공부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공부할 것이냐였다.” ,,, 끝내 종이를 다 채우고 새로운 종이에 나의 실패를 적어갔다. 그리고 각 실패의 옆쪽에 어떻게 할 것이냐는 해결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일을 7월 한 달 동안 했다. 더이상 나에게 있어 그 어떤 커리큘럼이나 교재, 수업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8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7월 한 달간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아들을 안쓰럽게 여기셨던 부모님께서 독서실비를 지원해 주셨다. 여전히 무모한 도전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지만, 그럼에도 후회 없이 달려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를 위해서, 또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성공해야만 했다. 지금껏 나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고생해 온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독서실비 이상으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 모아온 돈과 몇 가지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인강을 끊었다. 아침 6시 반부터 오전 9시까지 스터디카페,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독서실, 반수 때 했던 그 루틴을 다시 똑같이 수행했다. 돌고 돌아 다시 비좁은 16인실이었다. 여전히 걸어다니며 김밥을 먹었고, 여전히 독서실 휴게실에 자리가 없으면 화장실로 가 빵과 생수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냥 공부했다.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인 그 매일에 최선을 다했다.



공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했다. 한 달 간 썼던 실패의 일기 덕분에 나는 이제 나의 약점을 모두 정확하게 파악했다. 나의 약점에 정확한 약만 발라주면 되기에 더욱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과목마다 나만의 방법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모은 해결책을 규칙으로 만들어 방법론에 추가했다. 그렇게, 다시 기초부터 차근차근 나 자신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높은 건물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집중하고 몰입했다. 모든 영역의 개념을 노트에 적고 외우고 문제를 풀고 인강을 갈아 마셨다. 묵묵하게 그리고 묵직하게 매일 12시간 이상 공부만 했다.





<12> 마침내, 연세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수능 전 날, 밤 10시에 독서실 불을 끄고 짐을 챙겨, 여전히 축 늘어진 어깨와 함께 매일 오르던 그 언덕 아래 두 발을 붙이고 섰다. 이번엔, 항상 떨구던 고개를 들어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이 언덕 위에 우리집이 있다. 나는 그 매일을 이 언덕과 함께 했다. 그리고 이 모든 날의 나를 언덕만큼은 알아주길 간절히 빌었다. 내가 울며 웃으며 올랐던 너만큼은 내가 그동안 얼마만큼의 절망의 늪에서, 얼마 만큼의 빛을 갈구했는지 알아주길 바랐다. 짧은 기도를 마치고 늘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축 늘어진 어깨, 무거운 가방과 함께 언덕을 올랐다.



나의 세 번째 수능, 2021학년도 수능, 초연한 마음으로 국어부터 시작했다. 종료령이 울리기 10분 전, 손을 덜덜 떨며 지문을 읽어가던 안쓰러운 내가 있었다. 수학, 긴장감에 메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연신 닦아내던 그 날의 내가 있었다. 영어, 온 힘을 다해 집중하던 어린 날의 내가 있었다. 탐구, 혹시나 틀릴까 여러 번 확인하는 조마조마한 내가 있었다. 아랍어, 마지막까지 나의 모든 걸 바치던 21살의 내가 그곳에 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밖을 나와보니, 해는 저물고 깊은 어둠이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저 멀리 가로등 불빛 밑에 부모님이 서 계셨다. 아들을 마중 나오는 것이 벌써 3번째인데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시던 어머니가 서 계셨고 그 옆에는 무심하지만 따뜻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가 계셨다. 그 자리에서 주저 앉고 말았던 19살의 나보다 21살의 나는 더 성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뛰어가 그들을 안았다. 그래도 내가 도전했었음을, 그래도 내가 버텨냈었음을, 그래도 내가 아들로서도 잘 커가고 있었음을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비좁은 8인실에서 고개를 떨구고 공부 시작했던 18살, 나의 꿈과

복도에서 엎드려 땀을 닦으며 공부했던 19살, 나의 목표와

16인실 독서실에서 전력을 다했던 20살, 나의 갈망과

마지막, 그토록 이 터널의 끝이 있기를 바랐던 21살, 나의 빛을 모두 모아



2021학년도 수능 국수영탐탐 11121,

영어, 한국사 포함 전과목에서 4개를 틀리고,

연세대학교에 합격했다.

여기까지가 제 삼수 이야기였습니다!

이후부터는 제가 연세대학교를 다니며 겪었던 제 고뇌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쓰여 있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1년 연세대학교 1학년 그때





<13> 먼지 낀 플래너에서 가야할 길을 찾았다.



자리에 앉아 원고지에 빼곡한 글씨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내적 독백이 주된 서술 방식이었다. 한 문장을 적고 펜을 내려 놓고 다시 한 문장을 적고 펜을 내려놓길 반복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나의 하찮고 조막만한 세계로 그 어떤 것을 창조해내려고 하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어떤 소재가 있을까 하고 나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이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먼지 낀 플래너를 찾았다. 이곳엔 지난 3년간 고뇌하던 내가 매일마다 적은 일기가 들어 있었다. 윗켠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플래너를 펼쳐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내 눈에 이런 문장이 들어왔다. “적어도 나에게 이 시간은 헛되지 않을 거야, 수능이 끝나고 성공하면 지금 이 시간들로 누군가를 도와가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계속 달려보자” 그 자리에서 이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앞으로는 또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과외가 하고 싶어졌다. 지난 내 시간들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일이자,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내게 가장 맞는 일인 것 같았다. 또 다른 사람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 세계도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여기까지의 구상은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그랬듯 현실이 내 발목을 잡았다.





<14> 전단지를 돌렸는데, 단 하나의 연락도 없다.



과외를 하기로 마음 먹고 바로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지방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학원이 아닌 독서실을 다니며 혼자 공부했던 내겐 과외와 관련된 그 어떠한 정보도, 인맥도, 성과도, 경력도 없었다. 하지만, 목표를 정했으니 일단 뭐라도 해봐야 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이 오직 실행력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나였다. 그래서 나는 전단지를 만들고 인근 아파트 경비 아저씨를 찾아갔다. 관리사무소에 돈을 내고 단지를 돌며 전단지를 부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하나, 입구 게시판에 하나.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스팸 문자만 전보다 더 많이 오는 것 같았다. 씁쓸했지만 이 정도 실패는 이미 많이 경험했었다. 좌절을 떨치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자주 사용하던 당근마켓에 자세한 나의 이야기를 담아 과외 모집 글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경력만 적어 놓았지만 나는 장장 워드 10페이지에 걸친 이야기와 비전을 제시했다. 그렇게 드디어 한 명의 학생에게 연락이 왔다. 뛸 듯이 기뻐서 당장 날아갔다. 재수생, 국어 5등급, 집에서 30분거리, 시급은 만 오천 원이었다. 나는 내가 썼던 모든 노트를 그 아이에게 주며 방법론을 가르쳤다. 점점 학생이 따라오는 게 눈에 보였고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것이 나의 성장만큼이나 기쁜 일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과외를 더 늘려보고 싶었다. (이 학생은 이듬해, 홍익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이번엔 다른 과외 어플에 나의 이야기와 비전을 더 길게 적어 올려보았다. 그때 나는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고 이때는 그 어떤 것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장소도, 돈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불러준다면, 나에게 경험을 제공해준다면 당장의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용인에서 연락이 왔다. 지하철로 왕복 3시간 거리, 시급 만 오천 원, 당장 달려갔다. 동탄에서도 연락이 왔다. 왕복 2시간 반, 시급 이만 원 당연히 갔다. 지하철만 3번 갈아타야 하는 마천동에서도 나를 불렀다. 이런저런 생각이 필요 없다. 무조건 가서 내 모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됐다. 나에겐 경험이 가장 소중했다. 돈이 없는 통장, 걸어다니며 먹는 김밥은 이미 숱하게 경험해본 나였다. 지금 나에겐 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셨던 헝그리 정신이 필요했다.





<15> 운이 좋았던 대학교 1학년의 삶



힘든 기색 없이 10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하철로 긴 시간을 오며 가며 소설책도 충분히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점점 아이들의 성적도 오르기 시작했고 그 중 한 학생이 6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100점을 맞아왔다. 4월까지만 해도 3등급이던 학생이었기에 그 아이도 나도 같이 놀랐다. 소문은 순식간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룹이 형성되어 총 20명 이상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생이 늘어갈 수록 부담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만큼 더 노력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연세대에서 비대면 수업만 있었기에, 시간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록 학교 생활을 못해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지만 이미 지난 숱한 시간 동안 외로움을 넘어 외로운 사람 그 자체가 되어 있었기에 괜찮았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기회를 준 이 아이들에게 그만큼의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반수를 하며 다녔던 독서실 16인실을 다시 들어갔다. 아침에는 국어 공부, 점심부터 밤까지 대학 강의 듣기와 과외, 밤부터 새벽까지 대학 공부를 했다. 수험생이 아님에도 수험생처럼 살았다. 하지만, 나는 이게 더 편했다. 3년 간 단련되어서 그랬나 싶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았다. 연세대학교 합격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연초, 소설을 쓰기 시작해, 과외로 20명 이상의 학생을 가르치며 맞이한 연말까지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열심히 해도 될까 말까 한 험난한 세상에서 그래도 나의 노력만큼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운이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며 대학교 1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2022년 연세대학교 2학년 그때





<16> 단편소설은 완성했지만 나는 미완성이었다.



추위에 움츠러든 작은 생명들이 미약하게나마 태동의 힘을 보이는 늦겨울, 나는 서울 언덕 한 켠에 있는 나의 집에서 단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방학 동안, 몇 명의 학생들을 더 가르쳤고 오며 가며 소설책도 계속 읽었다. 집에 와서는 원고지를 잡고 한참을 끙끙대며 한 남자의 사랑과 절망, 내적 성숙에 관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끄적였다. 요 며칠 글이 잘 써지나 싶더니,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에, 드디어 단편 소설의 결말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완성된 원고지를 자랑스럽게 책상에 올려 놓고 과외를 하러 나갔다.



그 사이 나는 나의 꿈을 정할 수 있었다. 국어 강사가 되고 싶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소설을 쓰는 국어 강사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을 만나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동적인 일과 혼자 글을 쓰는 정적인 일의 만남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정-동적인 그 일이 때로는 침잠하고 때로는 활기차지는 나의 성격과 무척이나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언제나 내가 추구하는 이상은 현실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과외는 정말 잘되었다. 작년에 결과가 굉장히 좋았던 덕분인지 운이 좋게도 어머니들께서 나를 주변에 많이 알려주셨고 소문이 금세 돌아 여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어딘가 부족했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나는 더이상 타인을 만난다는 경험만을 위해 일을 하면 안되었다. 꿈을 국어 강사로 정한 이상, 더 다양한 현장에서의 경험이 필요했지만, 학원을 거의 다녀본 적도 없는 나는 국어 강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몰랐다. 이것이 내가 만난 이상의 본모습을 비춰주는 현실이었다. 소설을 쓰는 국어강사? 모두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자만적 이상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목표를 바꾸고 싶진 않았다. 까짓 거 부딪쳐 보면 되는 일이었다.





<17> 부딪쳐보면 길이 열릴 것이다.



강남의 한 국어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국어 조교를 뽑지는 않는지 정중하게 여쭤보았다. 당연히 될 리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이번엔 다른 국어 학원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역시나 갑작스럽게 전화를 건 낯선 사람을 뽑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나라도 당연히 미친 사람 취급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더욱 정중하고 공손하게 전화를 거는 수 밖에. 몇 번의 전화와 몇 번의 거절 끝에 어떤 한 학원의 원장님께서 너털스레 웃으시며, 일단 학원으로 와보라고 말씀하셨다. 여러 번의 실패로 주눅이 들어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한걸음에 달려갔다.



학원에 들어서서 프론트에 설명을 드리고 잠시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며 낯선 이 공간 위에 눈동자의 그림을 그렸다. 하얀 대리석 타일로 된 양 옆의 벽과 간이 조명이 밝히고 있는 조용한 복도, 빼곡히 붙어 있는 학생 실적 종이와 그 아래 무수히 쌓인 교재들, 다른 사람이 만든 교재로 스터디룸에서 과외를 하는 내가 일순간 초라해 보였다. 잔뜩 움추러든 어깨를 하고 앉아 있는 내게 원장님께서 다가오셨다. 인삿말과 간단한 소개를 뒤로 테스트지가 내 손에 쥐어졌다.



테스트를 통과하고 학원에서의 일을 시작했다. 모의고사를 풀고 오는 학생들의 질문을 1대1로 받아주고 피드백을 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내가 풀어보지 못한 사설 모의고사를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지문과 문제를 풀며 해설을 진행해야 했다. 문제를 틀릴 뻔한 아찔한 순간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한 번도 틀린 적 없이 해설을 잘할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내가 바라보는 세계도 점점 커져감을 느꼈다. 학원의 시스템도 점점 이해하게 되었고 국어 실력도 늘어갈 수 있었다. 역시, 부딪쳐서 안되는 일은 없었다.



대학 수업과 과외, 학원을 병행하며 공부하고 수십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1년의 시간을 모두 쏟았다. 중간중간 사설 모의고사를 검토하기도 했고 모의고사 외에 따로 수업을 준비해서 특강을 열어 보기도 했다. 여전히 오며 가며 소설책을 읽었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나였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 생활을 끝마치게 되었다.

2023년 연세대학교 3학년 그때





<18> 사색과 철학의 나라, 독일로의 교환학생.



붉은 합각머리 지붕이 일렬로 군림하는 고요한 거리, 그 평행의 선을 새까만 전신줄만이 노란 빛으로 잇고 있는 뮌헨 셸링 가. 세계 2차 대전 종전 직후 지어져 70년도 더 넘은 상아색의 5층 짜리 박스 모양의 집 옥탑 단칸방에서, 나는 통유리창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새로운 단편소설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번엔 반전이 있는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반전, 그리고 그 속에 분명한 사색과 좌절이 있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나를 소설 속에 던져 놓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더 정확하게 나는 끝없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내 현실에 거대한 반전을 기대하며 소설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밑바닥에서부터 성공까지 수차례의 고난을 겪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방에 인생을 역전시키는 반전이, 끝없이 불안한 내 현실에서 너무나 절실한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낭만을 위해, 유럽 여행을 위해 독일로 온 건 아니었다. 우리 집은 나에게 그런 교양적인 선물을 안겨주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저 우연한 계기로 기회를 잡게 되었고 이왕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시험에 응시하고 합격한 후, 내가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했지만, 나는 내 인생에 반전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독일은 사색과 철학의 나라라고 했다. 이곳에 적응하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거리는 고요했고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집 앞 빵집도 카페도 저 멀리 미술관도 일찍 문을 닫았다. 오후 6시가 넘으면, 독일인들은 집집마다 테라스에서 가족들과 둘러 앉아 저녁을 먹었다. 오후 8시까지도 해는 지지 않아 밖은 낮처럼 환했다. 독일 대학 강의를 듣고 5층 나의 단칸방으로 돌아와 빵집에서 사온 바게트 위에 딸기잼을 발라 우유와 함께 저녁을 해결하고 통유리창 앞 책상에 앉으면 이제 할 게 없었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친구들과 사람들,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니시는 나의 옆집 독일인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대화, 스위스, 영국, 체코 여행 등 수 없이 많은 소중한 경험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있는 광활한 시간동안 사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밖에서 공놀이를 하는 독일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다 문득, 독일로 오기 전, 과외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아이들은 나에게 커뮤니티를 통해 나를 더 넓은 세상에 알려보라고 이야기했다. 그 당시 SNS도 전혀 하지 않았던 나에게 커뮤니티는 꽤나 어려운 영역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역시나 부딪쳐 보면 되는 일이었다. 늘 그랬듯, 일단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었다. 실패보다 도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해야 했다.





<19> 수십 편의 칼럼 그리고 새로운 소설의 결말.



어김없이, 정신 없이 독일 대학 강의를 듣고 나의 낡은 집으로 돌아와 바게트에 잼을 발라 입에 물고 통 유리창 앞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오늘은 소설을 쓰는 대신 커뮤니티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가장 먼저, 닉네임을 지어 보기로 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옆에 놓인 독일 소설의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mit” 독일어로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였다. ‘함께 한다는 건, 그래 언제든 좋은 뜻이잖아.’ 속으로 되뇌이며, 밋mit이라는 이름을 적어보았다. 그리고 전 날 밤새 적어 두었던 국어 칼럼 하나를 올려보았다. 긴장 가득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저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의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 감사의 인사와 응원의 댓글이었다.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나 혼자만의 자기평가에 익숙해진 나였다. 누군가의 칭찬을 받아본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칭찬보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 큰 힘을 받은 나였다. 고개를 떨구고 불안을 곱씹으며, 간절함을 담아 플래너에 적었던 삼반수, 그때 그 문장이 비로소 지금에서야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수십 편의 칼럼을 더 올렸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했고 감사의 인사에 매번 감동하며 더 많은 힘을 받게 되었다. 그 힘은 또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매번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에너지를 탐색했던 내게 다른 사람들이 주는 힘의 원천이 더욱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무엇인지, 왜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지 몸으로 느끼며, 나도 그 사람들에게 나의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쇄소에 가서 국어 교재를 뽑았다. 독일에서도 네이버가 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독일에서 아침마다 국어를 풀었다. 독일에서 소설을 쓰며 국어를 푸는 국어 강사가 되고 싶은 대학생. 재미삼아 수식어를 하나씩 추가해가며 나 스스로도 실소를 터뜨렸다. 독일 대학을 성실히 다니며, 밤에는 칼럼을 썼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최선을 다했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부딪쳐보는 게 중요했다.



독일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 배낭을 메고 체코 프라하에 갔다. 프라하의 명물인 굴뚝빵이 풍기는 단내가 온 골목의 벌들을 홀려 이리저리 붕붕 날아다니게 만들었다. 단내에 홀린 벌들을 몇 번의 손짓으로 털어내던 나도 이내 까를교 한 가운데에 멈춰 서서, 프라하 성이 주는 낭만적 자태에 홀리고 말았다. 광경에 미혹된 나는 벤치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내 그 공간이 주는 아름다움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의 두 번째 단편소설의 결말을 바로 이곳, 프라하에서 찾게 되었다. 파스텔 톤의 오색 빛이 붉은 성채의 우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그 잔잔한 분위기 속에 불안의 내면을 가진 한 인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혹시나 나중에, 프라하의 밤을 배경으로 결말이 지어진 소설을 찾는다면, 반갑게 인사해 주길, 그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너만큼은 알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한국으로 돌아와 수십 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나의 새로운 도전, 정시팟이었다. 자칫 홍보로 이어져 나의 이야기의 진정성이 훼손될 것이 두려워 말을 줄이고자 한다. 그렇게 눈코 뜰 세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나를 찾아준 그 모든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렇게 조금 더 성장한 24살의 나, 2023년 대학교 3학년 나의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2024년 연세대학교 4학년 지금





<20> 마지막까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너처럼.



지금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있는 너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내가 자신 있게 말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긴 글을 읽으려 하지 않고 또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있다는 건, 너도 나처럼, 깊은 내면 그 어딘가에 분명히 간절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간절함은 도전이 되고 도전은 성공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충분히 불안해하고 충분히 맞서 싸우자. 불안한 밤이 찾아오고 실패의 역사가 줄곧 너를 괴롭혀도 초연하게 내 갈 길만 묵묵히 걸어가자.



마지막까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너처럼 나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진심으로 불안해했고 연이은 실패에 진심으로 좌절했고 나의 현실에 진심으로 슬퍼했었다. 그러나 불안하다는 건, 좌절했다는 건, 슬퍼했다는 건, 나의 내면 어딘가에 이상을 꿈꾸는 간절함이 있다는 말과 같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이 글이 너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내 인생이 너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면, 너는 너가 원하는 그 이상에 다가설 수 있다. 더이상 이리저리 둘러보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묵묵히 앞으로, 앞으로만 걸어가자. 너가 가고자 하는 길을 정했다면 그리고 거기에 부딪쳐 보고자 뛰어들었다면, 너는 나의 역사가 장담컨대, 기필코 성공할 것이다. 고독한 나의 역사가 너의 성공을 밝혀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온 지, 4-5년이 지났음에도 나의 친동생은 자신의 방 하나 없이 거실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언덕 한 켠의 그 집은 너무 비좁아 방이 부족했다. 올해 고3이 된 나의 동생에게 방 하나를 주고자, 나는 신촌 끝자락 어느 1층에 방을 잡아 살고 있다. 이곳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양동이를 바닥에 받쳐 두었고 어제 저녁, 전등이 나가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머리맡의 무드등 하나에 내 생활을 의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대학을 다니고 소설을 마무리하고 정시팟을 위한 수업을 준비하고 독학서를 출판해보고자 매일 책을 만들고 있다. 나에게도 올해는 나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해이다. 당연히 불안하고 또 당연히 실패가 두렵다. 하지만 이제 너와 내가 아는 사실이 있다. 그냥 묵묵히 최선을 다하자. 나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하건, 나의 선택에 확신이 있건 없건, 일단 가고자 했다면 끝까지 초연하게 최선을 다해 걸어가보자. 너에게도 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도 가슴 깊이 하는 말이다. 이제 길고 길었던 이 이야기를 끝마칠 때가 된 것 같다.



PC방을 빠져나와 독서실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던 18살의 어린 나에게도,

1년간 죽어라 공부했던 19살의 나와 꿋꿋히 버티며 공부해준 20살의 나에게도,

마지막까지 목표를 향해 도전했던 21살의 나와 새로운 도전을 했던 22살의 나에게도,

부딪치고 또 부딪쳐준 23살의 나와 독일에서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준 24살의 나에게도,

그리고 지금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준 너에게도 진심으로 온 마음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우리, 올해 수능이 끝나고 작은 카페에서 만나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보자.

나는 지금보다 더 성장했을 너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듣고 싶다.



우리가 혹여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나중에 나의 소설에서 만나자.

프라하의 밤을 기억해주길.







-25살의 밋mit-






무슨 에세이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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